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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사랑은 왜 고통스럽습니까?
< 대답>
사랑 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복에 이르는 길을 닦아가기 때문이다,
사랑 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사랑은 전환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변화를 일으킨다,
모든 변화는 고통스럽다, 새 것을 위해 낡은 것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낡은 것은 익숙하며 안전하고 안정적이지만, 새 것은 낯설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넓은 바다로 나가는 것과 같다,
새로운 일에는 마음을 사용할 수 없다,
낡은
일을 할 때 마음은 아주 노련하다,
마음은 오직 낡은 것에 대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새로
운 것과 만나면 마음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생긴다,
낡았지만 안전하고 편안한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의 동일한 고통을 느껴야 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와 동일한 고통을 느껴야 한다,
어린 새가 둥지에서 처음으로 혼자 날아오르려 애쓸 때와 동일한 고통을 느껴야 한다,
미지
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불안함, 그리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겁에 질린다.
게다가 자아가 있는 상태에서 자아가 사라지는 상태로 변화하기 때문에 그 슬픔은 매우 깊다,
그러나 슬픔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황홀경을 맛볼 수 없다,
금이 순수하게 제련되려면 불을 통과해야 하는 법이다.
사랑
은 불이다.
사랑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랑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 나 그들 역시 고통을 당한다. 게다가 그 고통은 헛되다.
사랑 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다. 사랑 속에서 겪는 고통은 창조적이다.
그것은 사람을 높은 경지의 의식으로 끌어올린다,
사랑 없이
당하는 고통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사람들을 제자리에서 맴돌게 할 뿐이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도취적이며 닫혀 있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는가?
타인 은 우리의 거울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하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다.
사랑은 자신에 대해 매우 근본적인 것을 알게 한다.
깊은 사랑을 통해 다른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열정과 기쁨의 강도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것
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거울과도 같다,
그 사랑이 순수할수록, 그 사랑이 고결할수록, 거울은 더 맑고 성능이 좋아진다,
그러나 사랑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열려 있어야 하며, 연약해져야 한다.
갑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고통스럽다,
방어 하지 않으며,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늘 위험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보는 자신의 그림자가 추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거울을 피한다!
그러나 거울을 피한다고 자기 자신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을 피한다고 해서 자신이 성장하는 것 역시 아니다,
도전
해야 한다.
사랑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신을 향한 첫 걸음이며, 결코 건너뛸 수 없다,
사랑의 단계를 건너뛰려는 사람은 결코 신에게로 도달할 수 없다.
사랑은 필수적인 단계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존재에 의해서만 자신의 총체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가 향상되고, 자기도취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폐쇄
된 하늘에서 열린 하늘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열려 있는 하늘이다,
사랑하면 날개를 가질 수 있다,
하지
만 무한히 열려 있는 하늘은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에고를 버리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우리는 에고를 발달시키도록 교육받았다,
에고가 유리의 유일한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는 에고를 방어했고, 그것을 치장했으며,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에고를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 일은 분명히 고통스럽다,
에고는 우리가 평생동안 만들고 작업한 것이다,
'나
는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바로 추한 에고이다.
그 생각이 추한 이유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환상이다,
그러나 사회는 바로 그런 생각에 기반을 두고 존재한다,
각
개인은 현존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개체라는 관념이다.
이 세상에 분리된 개인은 없다,
오로지 현존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전체와 분리되어 있는 에고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체의 일부분이다,
전체는 우리를 관통하고 우리 안에서 숨쉬고 우리안에서 박동하고 있다,
전체
는 우리의 삶이다.
사랑은 자신의 에고가 아닌 다른 존재와 처음으로 조화로운 파장을 맞추어보는 경험을 하게 한다,
사랑
은 에고의 일부분이 아닌 누군가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한 여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친구나 또는 한 남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혹은 어머니나 자식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모든
인류와 조화를 이루는 게 왜 불가능하겠는가?
한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게 그토록 큰 기쁨이었다면, 모든 인류와 조화를 이루는 기쁨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모든 인류와 조화를 이루는 게 가능하다면 새와 나무와 동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왜 불가능하겠는가?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사랑은 사다리이다,
한 사람으로 시작해서 전체로 끝난다,
사랑은 시작이며, 그 마지막은 신이다,
사랑
을 두려워하고, 커져 가는 사랑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두운 독방에 갇히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어두운 독방에 살고 있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며,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현대의 정신이 보여주는 강박 증세이다,
세상 에는 의식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창조적인 문제들이 있고, 아무 의미도 없는 문제들이 있다.
의식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문제들은 그저 사람들을 얽어매고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사랑 은 문제를 일으킨다. 사 랑을 피해가면서 문제들을 피해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일으키는 문제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다!
반드시 직면해야 하고 마주쳐야 하는 문제들이다.
살면서 부대껴야 하고, 그래서 통과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문제들이다.
사랑은 우리가 정말로 해야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일들이다.
사랑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들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수단이고 사랑은 목적이다.
그러
므로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사랑 속으로 뛰어들어라.
머뭇거리는 많은 사람들처럼 사랑 속으로 곧바로 뛰어들지 못하면,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대의 인생은 성지 순례의 길에 오르지 못하며, 바다로 향하는 강물이 되지 못한다,
그대
의 인생은 고여 있는 물이 되어, 곧 진흙과 오물로 뒤덮일 것이다.
그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흘러야 한다, 깨끗한 물이 되기
위한 과정은 흐르는 것이다.
모든 연인들은 순결하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순결할 수 없다,
그들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므로 언젠가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의 인생은 죽어 있다.
여기가 바로 현대인이 서 있는 자리이다,
그 때문에 이 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정신병과 광기가 만연하고 있다,
심리적인 질병은 전염병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것
은 더 이상 몇몇 개인만이 걸리는 병이 아니다.
현
실적으로 온 세상이 정신병원이 되어 간다,
온
인류는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병은 자기도취로 정체되어 있는 자아에서 온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분리된 개체라는 환상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쳐간다.
이러한 광기는 의미 없고, 비생산적이며, 창조적이지 못하다.
사람
들은 자살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자살은 비생산적이고, 창조적이지 않다.
독약을 마시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총을 쏘는 것만으로 자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느린 절차를 밟아서 자살할 수 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갑자기
자살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천히 자살을 감행한다,
서서히, 점진적으로 사람들은 죽어간다,
이러
한 자살의 경향이 거의 우주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근본적 원인은 우리가 사랑의 언어를 망각해 가는데 있다,
사랑
이라고 불리는 모험 속으로 뛰어들라는 격려를 우리는 이미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섹스에 관심을 갖는다. 섹스는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간적이며 몰입하지 않아도 좋다.
사랑은 몰입이며 헌신이다.
사랑은 순간의 일이 아니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사랑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몰입이다.
사랑
은 친밀함이 필요하다.
그리
고 서로 친밀함을 느껴야만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줄 수 있다.
단지 성적인 흥미만을 느끼면서 남자나 여자를 만나면, 그것은 결코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상대 방의 영혼을 피해간 것이다. 단지 상대의 육체를 사용한 다음 도망 가버린 것이다.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의 진짜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친밀해지지 않았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화두이다.
고통스럽지만 피하지 말라.
사랑을 피해버리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그
속으로 들어가,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라.
황
홀함은 아픔을 통해 온다.
슬프겠지만, 슬픔을 통해 기쁨이 생긴다.
에고
로서의 그대는 죽지만, 신으로, 붓다로 다시 태어난다.
또한 사랑은 우리에게 도와 수피즘 그리고 선의 맛을 일별하게 한다.
사랑은 인생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그들
이 하는 말은 모두 인생에서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로 들으면 된다.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라,
어두운 밤을 뚫고 지나가면 아름다운 태양이 떠오르는 곳에 다다른다,
태양은 어두운 밤을 자궁으로 삼아 태어난다,
어두
운 밤을 거쳐야만 아침이 오는 법이다.
나의 접근법은 모두 사랑이다,
나는
오로지 사랑만을 가르친다,
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그것은 공허한 단어이다,
기도 에 대해서도 잊어버려라,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행해지는 의식에 불과하다.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은 자연스러운 기도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함께 태어났다,
사랑은 진정한 신이다,
신학
적인 신이 아니라 붓다, 예수, 모하메드 그리고 수피의 신이다.
사랑은 분리된 개체로서의 그대를 없애고 그대를 무한하게 만들어 주는 수단이며 장치이다,
사랑
의 문을 통과하고 나면 한 방울의 이슬은 저 거대한 대양으로 사라져 버린다.
한 사람이 한 방울의 이슬처럼 사라지기 시작할 때,
오랜 세월 동안
한 방울의 이슬로 살아왔다면, 그는 확실히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인데, 이것이 사라지고 있으니, 나는
죽어간다."
그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사라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환상과 자신을 동일시해왔으나, 환상은 그저 환상이다.
환상이 사라지고 나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으리라,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날 때 우리는 지극한 기쁨의 정점에 올라서 향연을 벌인다.
< 질문>
사랑과 호감, 즉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보통의 사랑과 영적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 대답>
사랑과 호감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호감은 맹세하지 않으나 사랑은 맹세이다.
그래
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
실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맹세라는 맥락에서 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랑해."라고 말한다.
어떻
게 아이스크림을 사랑하겠는가?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들 말한다. "내 개를 사랑해. 내 차를 사랑해. 나는 이것을
사랑하고 저것을 사랑해."
사실
사람들은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여러 달 동안 데이트를 했다.
그 여자는 당연히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렸다.
그
남자와 정사를 나누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이제는 '사랑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 차이점을 알겠는가?
사랑
에 빠지는 것은 사랑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상태이다.
사랑을 만든다는 표현은 불경스럽게 들리며, 사랑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말이다.
마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들린다. 그대가 하는 일은 조종하고 지배하는 일이다.
이제
는 사랑에 빠진다는 말보다는 '사랑을 만든다'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그 남자는 그 여자와 정사를 가지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
서 여자는 그 말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느 날 그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을 당신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군요.
저는 이 말을 지금 해야만 하겠어요.
더
이상 속에 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여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다.
"어서 말하세요." 그 여자가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저는 지금 그 말을 하려고 합니다.
더 이상 속에 담아둘 수가 없어요.
저는
당신을 정말로 많이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한다.
"나
는 당신을 좋아해요."
왜 그들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사랑은 맹세이고, 몰입이고, 위험이며, 책임이기 때문이다.
호감은 순간적인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할 수 있지만, 내일은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그 말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당신은 저를 의지해도 됩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사랑은 약속이다. 호감은 약속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을 좋아해요."라고 말할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이런 의미다.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아이스 크림과 자동차를 좋아한다. 같은 취향으로 나는 너를 좋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
신은 사랑스럽군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
살은 상대방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약속에 대한 부담이 있다.
사랑은 맹세와 약속과 몰입을 내포한다.
사랑은 영원한 그 무엇이다.
호감
은 순간적이며, 부담이 없고, 책임도 없다.
그대는 나에게 묻는다.
사랑과 호감, 즉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보통의 사랑과 영적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랑과 호감은 다르다.
그러
나 보통의 사랑과 영적인 사랑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사랑은 영적이다.
나는 그냥 보통의 사랑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보통의 사랑이라면 호감이다.
사랑
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특별하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한 여자나 남자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저는 당신의 육체에 반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육체는 늙어가겠지만, 저는 육체가 아닌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
의 가장 내밀한 중심, 신성한 중심을 저는 압니다."
호감은 피상적인 것이다.
사랑
은 그 사람의 핵심을 관통하여 그 영혼을 건드리는 것이다.
어떤 사랑도 평범하지 않다.
사랑은 평범할 수 없다.
평범하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평범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언제나 특별하고 영적이다.
그것이 호감과 사랑의 차이점이다.
호감은 물질적이며, 사랑은 영적이다.
오쇼 라즈니쉬 / 사랑, 자유, 그리고 홀로서기(Love, Freedom, Alon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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