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정신적으로 그렇게 했어요. 때때로 어떤 좋은 느낌이 오기도 했고 조용한 행복의 분위기에 젖어 들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봐서 저는 체험을 위해서 애쓰기 보다는 조용하고 수용적으로 되려고 애써 왔습니다.
답: 좋은 기분이 되어 있을 때에 실제로 체험하던 게 뭔가?
문: 내적인 평온감, 평화와 침묵의 느낌이지요.
답: 자신이 의식을 놓칠 때를 눈치 채요?
문: 예, 때때로 그리고 잠깐씩 그렇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저는 그냥 안팎으로 고요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답: 무슨 고요? 뭔가 깊은 잠 같은 것, 그렇지만 동시에 의식하고 있는것? 일종의 깨어있는 잠 같은 것?
문: 깬 채로 자고 있는 것이지요.
답: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들, 즉 욕망 두려움 등등 마음의 여섯 적들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야. 일단 마음이 그들로부터 자유로와 지면 나머지는 쉽게 이루어지게 돼. 비눗물에 담긴 옷감이 깨끗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역시 순수한 느낌의 흐름 속에서 정화되는 것이야.
조용히 앉아서 자신을 지켜볼 적에 온갖 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가 있는데 그럴 때는 거기에 대해 아무 일도 하지말고 거기에 대해 반응하지도 않도록 해. 왜냐하면 그것들은 올 때에 온 것처럼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말이야.
중요한 것은 자가 자신, 혹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전적인 자각이야.
문: 지금 선생님께서"자기 자신"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일상적인 자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답: 그래, 객관적으로 유일하게 관찰 가능한 인상(人相)을 말하는 것이지. 그러나 관찰자는 관찰 너머에 있는 것이야. 그리고 관찰가능한 것은 참된 자아가 아니지.
문: 저는 언제나 끊임없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답: 자넨 관찰할 수는 있지만 관찰자를 관찰할 수는 없어. 궁극적인 관찰자를 아는 것은 직접적 통찰에 의한 것이지 관찰에 기초한 논리적 과정에 의해 가능한 것은 아니야. 자넨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이지만, 앎에 의해 알아지는 것은 자신이 아니야.
자네라고 생각되는 것이 모두 그래. 또한 관찰자든 관찰되는 것이든 실제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야. 관찰되는 것과 관찰 , 그리고 관찰자는 모두가 정신적인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야. 오직 참자아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네.
문: 마음은 왜 그토록 많은 분별을 낳습니까?
답: 나누고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의 본성이지. 나누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하지만 분리라는 것은 사실과 배치되지 않나? 사물들과 사람들은 다르긴 하지만 분리된 것은 아니야. 자연도 하나이고 진리도 하나지. 대립물들은 많지만 대립은 없다고나 할까.
문: 제가 느끼기에는 천성적으로 제가 활동적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활동성을 피하라는 충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활동하지 않고 조용히 있으려고 할수록 뭔가를 하려는 충동이 더 커집니다.
그러다보니 외적으로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는 저의 기질과는 다른 어떤 상태를 위해 싸우게 됩니다. 일을 하고 싶어하는 갈망에 대한 치료법이 있습니까?
답; 일과 단순한 활동은 서로 다른 것이야. 모든 자연이 일을 하고 있어. 일이 자연이고 자연이 일이야. 반면 활동이라는 것은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소유욕과 쾌락에 대한 갈망, 그리고 고통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는 거야.
일이라는 것은 전체에 의한 전체를 위한 것인 반면, 활동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의해 행해지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
문: 활동성에 치료법이 있습니까?
답; 관찰을 하라구. 그것을 멈추게 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구속되어 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순전히 육체적 존속 때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일깨우도록 해. 욕망과 두려움, 어려움과 즐거움 등등은 그것이 나타날 장소인 자네라는 인물이 없으면 나타날 수 없는 것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모든 일이 지각의 중심인 자네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어, 그것들의 근원인 바로 자네를 보라구 말이야. 가리키는 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알도록 해.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행해질 필요가 있어.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꾸준함이지.
문: 저는 정말 제 자신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간 특수한 상태 속에 들어가곤 합니다. 예기치 못하게 일시적으로 말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런 상태들을 조절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답; 육신은 물질적인 것이니 바뀌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그러나 마음은 단지 정신적 습관들의 꾸러미일 뿐일세. 생각과 느낌의 방식들의 다발일 뿐이지. 변화를 위해서는 그것들이 표면으로 드러나 잘 조사되어야만 해.
그것도 물론 시간이 걸리지. 결심을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잘 살펴보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세.
문: 저는 무슨 일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뚜렷이 압니다만 싫증이 나고 힘이 약해져 있고 인간적인 교제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독과 명상에 주어져야 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답: 하고 싶은 일을 해.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지마. 폭력을 쓰면 어렵고 딱딱해지는 것이야. 자기 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고 그것과 싸우지 말아. 그냥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라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냥 내버려두라구. 밖에서 생기는 일에 푹 빠져서 자신을 내맡기지 말라구.
문: 자신이 관찰자라는 사실을 언제나 되새기는 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움직이는 마음 너머에 움직이지 않는 자각의 배경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마음은 반드시 참된 자아를 알아서 그것을 존경하고 , 일식이 생겼을 때의 달처럼 참된 자아를 가리는 일을 중지해야만 하지. 다만, 관찰 가능하고 체험 가능한 것은 그 무엇도 자신이 아니며, 또 자신을 구속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구.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보지말고 말이야.
문: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따르자면 저는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답; 자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이고 자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자고 있다는 셈이야. 어쨋거나 깨어있는 게 사실이니 그러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알고 있음을 아는 거야. 주의깊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깨어서 자각의 장을 넓히고 깊히도록 해. 자넨 언제나 마음을 의식하고 있지만, 의식하고 있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알고 있지는 못해.
문: 제가 이해하기로는 선생님께서는 "마음", '의식" "자각" 이라는 말들을 각각 다른 의미로 쓰시는 것 같습니다.
답; 이런 식으로 생각해 봐.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단 말이야. 자네가 그걸 보지 않고 있을 때에도 말이지. 그런데 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알 때에는 그걸 의식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상태이지.
의식은 이 감각과 지각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돼.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그렇게 끊임없이 옮겨다니고 있는 것이지. 그러다가 자각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의식의 전체, 즉 마음의 전체상을 직접 통찰하게 되는 걸 말해.
마음이라는 것은 몸이라는 형태 속을 끊임없이 흐르는 강과 같은 거야. 그런대. 자넨 한 동안은 어떤 특정한 마음의 물결과 자신을 동일시하고는 "나의 생각" 이라고 하지. 자네가 의식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일 뿐이야. 자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 전체를 알게 되는 것이고 말이야.
문: 모두가 의식이 있지만 모두가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답:"모두가 의식이 있다" 고 할게 아니라"의식이 있다"라고 말을 해야지, 그리고 모든 것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바로 의식 속에서라네.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도 의식의 바다 위의 물결일 뿐이지.
그 파도는 그냥 왔다가는 거야. 그리고 바다로서는 무한하고 영원하지. 지금 자네 자신의 존재의 바다이며 모든 생명의 자궁이라고 봐도 좋아. 이런 것들은 물론 비유에 불과한 것이고 진실은 묘사할 수가 없어. 진리라는 것은 오직 자기가 그렇게 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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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진리를 구하는 것이 그만한 고통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답; 진리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거야. 제 정신으로 창조적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남들과 나눌 수 있는 무한한 부를 지니고 싶으면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돼.
마음은 몸에 집중되지만 자각은 자유로운 것이야. 육신의 충동이 있고 마음은 즐거움과 고통이 있지. 그러나 자각은 집착이 없고 흔들림도 없어. 그것은 빛이 있고 조용하며, 평화롭고 깨어있으며 두려움이 없지.
자네의 본성인 그것에 대해 명상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되도록 하라구. 그리하면 그것을 가슴 가득히 깨닫게 될 거야. 마음은 발생하는 일에 관심이 있지만 자각은 마음 그 자체에 관심이 있어.
아이들은 장난감을 좋아 하지만 엄마는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구. 지치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 난 아주 텅 비었고 그 비어 있음과 함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 내게 돌아왔어. 이제 나를 보면 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잃어버렸어.
문: 지금처럼 저희들에게 말을 하실 때 선생님은 의식이 없으신가요?
답: 난 의식이 있지도 없지도 않아. 마음과, 그리고 또 그 마음의 여러 가지 상태들과 조건들을 넘어서 있다구. 분별은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마음에만 적용이 되는 거야. 또 오직 마음에만 적용되는 거야.
그에 반해 난 순수한 의식 그 자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부서지지 않는 자각이야. 난 자네보다 더 참된 상태에 있어. 난 한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구별과 분리에 의해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
육신이 지속되는 한 육신은 다른 것들처럼 역시 필요한 것이 있지만 나는 정신적인 과정이 끝났어.
문: 선생님의 행동을 보면 생각을 하는 사람 같은 데요.
답; 왜 생각을 하지 않겠어? 그러나 나의 생각은 마치 내가 소화를 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이고 목적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거야.
문; 선생님의 생각이 무의식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답: 그것에 반대할 욕망도 두려움도 없지. 도대체 무엇이 그 생각을 나쁘게 만들 수 있나? 일단 내 자신과 내가 대면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나면, 언제나 내 자신을 점검하고 있을 필요는 없어. 손목시계가 바른 시간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시계를 볼 때마다 확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문: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이 아니라면 누가 말을 합니까?
답: 질문을 듣는 그것이 대답도 하지.
문; 그런데 그게 누구냔 말입니까?
답;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겠지. 내가 밖으로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난 그 안에서 모든 일이 발생하는 무한한 의식의 바다야. 또한 모든 존재와 인식을 넘어선 순수한 존재의 축복이야.
난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난 모두라고도 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니까 난 그 무엇도 아니야. 지금 나로 하여금 자네의 질문에 대답하게 만드는 것은 불이 타고 물이 흐르고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도록 하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과 같은 힘이야.
내게는 내가 쓰는 말이나 스타일 때문에 인간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겠지만 사실 내겐 전혀 인간적인 것이 없어.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은 욕망과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들의 다발일 뿐이야.나의 경우에는 그러한 패턴이 없어. 난 욕망과 두려움이 없으니 어떤 틀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지.
문: 하지만 선생님도 죽기는 하시겠지요?
답: 생명이 달아나고 육신은 죽겠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해. 나는 시공을 넘어 존재해. 그러면서 난 다른 무엇에 원인지음을 받지도 않고 다른 것이 원인이 되지도 않는 존재의 기반으로 그냥 여여한 거야.
문: 괜찮으시다면 선생님께서 지금의 상태에 어떻게 이르셨는지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답: 나의 스승께서 내게 " 내가 있음" 이라는 느낌에 끈질기게 붙어서 한 순간이라도 거기에서 멀어지지 말라고 하셨지. 난 최선을 다해서 그분을 따랐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나의 내면에서 그분의 가르침이 옳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가 한 일이라곤 그의 가르침과 그분의 얼굴과 그분의 말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뿐이였어. 그랬더니 그것이 마음을 종식시켰고,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구속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게 된거야.
문: 그 깨달음은 갑자기 왔습니까. 천천히 왔습니까.
답: 어느 쪽도 아니야. 사람은 언제나 구속없는 참존재일 뿐이고 마음에 욕망과 두려움이 없어져 깨끗해질 때에 깨닫는 것은 마음이지.
문: 깨달음에 대한 욕망조차 없어질 때에 말입니까?
답; 모든 욕망들을 끝내려는 욕망은 가장 특수한 욕망이야. 마치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독특한 두려움이듯이 말이야. 하나는 움켜쥐지를 못하게 하고 또 하나는 움켜쥐려고 하지. 같은 낱말을 쓸지라도 두 상태는 같은 것이 아니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욕망에 중독된 것이 아니고 욕망에 맞서는 구도자야.
자유에 대한 일반적인 갈망은 시작에 불과하고, 바른 방법을 발견해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야. 구도자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려는 오직 하나만의 욕망을 지니는데, 모든 욕망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야심찬 것이야.
왜냐하면 그 무엇도 그리고 구 누구도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지. 찾는자와 추구되는 것은 하나이고 중요한 것은 실제를 찾아 나서는 거야.
문: 찾는 일은 끝나게 되어 있으니 찾고 나면 찾는 자는 남게 되지 않습니까?
답: 찾는 자는 없어지고 찾음 그 자체만 남아 , 찾음 그 자체는 궁극적이고 무시간적인 현실이야.
(찾는자와 찾고자 하는 것은 하나이다)
문: 찾는다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완전하지 못하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답: 아니야. 그것은 불완전 불완벽함을 거부하는 거야. 진리를 찾는 그 자체가 진리의 움직임 이라구. 어떻게 보면 모든 추구 자체가 참된 축복을 위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진리의 축복이야.
그러나 찾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의식하고 있는 상태의 뿌리, 즉 마음 너머의 빛인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는 뜻이야. 이러한 추구는 결코 끝나지 않아. 반면에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쉴새 없는 갈망은 참된 과정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진리를 찾는다거나 하나님 혹은 스승을 찾는 다거나 본성을 찾는 다거나 다 마찬가지야. 하나를 발견하면 모든 것이 발견돼. "내가 있음"과 "하나님이 계심" 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그때에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거야.
그리하여 한 점의 의문도 없이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심으로 해서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 그 둘은 하나거든.
문: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깨달음도 미리 정해져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점에 있어서 자유로운 것입니까?
답: 운명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과 명칭에 관계될 뿐이야. 그러나 자넨 몸도 마음도 아니기 때문에 운명이 자넬 지배할 수 없어. 자넨 절대적으로 자유로와. 컵은 그 형태와 재료, 용도 등등에 의해 조건지어져 있지만 그 내부의 공간은 자유로운 것처럼 말이야.
그 공간은 그 컵과 연관지어 볼 때만 우연히 그 컵 속에 있게 되는 거야.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냥 공간 일 뿐이야. 또 육신이 있는 한 자넨 체화(體化) 된 것처럼 보이지만 육신이 없다고 해서 자네가 육체로부터 분리된 것은 아니야.
자넨 그냥 존재할 뿐이야.
운명조차도 하나의 상념에 불과해. 말이란 건 어떠한 방식으로든 짜맞춰질 수 있어. 그렇게 말은 다를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변화를 낳는 건 아니야.
사물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이 있고, 또 모두가 그럴 듯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야. 마치 운전을 할 때에는 역학과 화학의 법칙에 복종하게 되지만 차에서 나오고 나면 생리학과 생화학의 법칙 아래에 있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듯 자네를 운명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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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명상이 무엇이며 또 명상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답: 초보자일 경우에는 어떤 공식화된 명상이나 기도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의 명상이 있을 뿐이야. 그것은 생각에 자리를 내어주길 깨끗이 거부하는 것이지. 자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그 자체가 명상이야.
문: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이 이루어집니까?
답: 생각을 놔두고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시작하지. 또 관찰을 놔두고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시작하지. 그렇게 관찰을 하는 것 자체가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나중에 마음 전체가 완전히 멈춘다구.
일단 마음이 조용해지면 그 마음을 조용히 유지 시키라구. 평화를 지겨워하지 말고 그 속에 머무르며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 가라구.
문: 다른 생각들을 없애기 위해 하나의 생각을 붙드는 방법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만 어떻게 모든 생각을 멀리 할 수 있습니까? 관찰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생각이 아닙니까?
답: 그냥 해봐. 새롭게 실험을 해보는 거지. 과거의 경험에 묶이지 않도록 하라구. 자네의 생각을 지켜보고 또 자신이 생각을 지켜보고 있음을 보라구. 그러면 모든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갑자기 나타나고 그것의 축복에 의해 그것을 자각하게 돼.
문: 선생님께서는 세상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가요? 동파키스탄의 저 소요를 보십시오. 그런 일들이 전혀 선생님께는 느낌이 없나보죠?
답: 나도 신문을 보니까 세상 돌아가는 건 알지. 하지만 나의 반응은 자네와는 달라. 자네들은 일이 벌어진 후에 해결을 하려들지만 난 예방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구.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 아닌가?
사람들이 분리하는 습관이 있고 이기적이고 공격적이면 반드시 그런 일들이 생기게 되어있어. 우리가 세계 속에서 평화와 조화를 원하면 우리들의 가슴속, 마음 속에 먼저 평화와 조화가 있어야 해.
그러한 변화는 바깥에서는 곤란하고 반드시 내부에서 생겨나는 거야.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체제에서 전쟁을 없애게 되어 있어. 평화로운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어?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면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니. 나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유일한 원인이 자기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도와줌으로써 나의 역할을 하는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유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내면의 나, 즉 나의 본질적인 상태라는 것은 사회적인 의식과 유용성이라는 측면으로 표현될 수 없어. 내가 나의 상태에 관한 비유도 하고 우화를 빌어 말하기도 하지만 난 그게 정확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체험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건 오히려 체험 그 자체야.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대립시켜야 하지만 이것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니 마음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지.
세계라는 건 타이프 치는 종이와 비슷해. 읽는 것과 의미는 독자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지만 종이는 공통의 요소로서 언제나 존재하는데도 거의 인지되지 않잖아? 또 리본을 떼고 타이프를 쳐도 종이에 아무런 자국이 없지? 내 마음도 그래. 여러 가지 안상들이 계속 다가오지만 아무런 자국도 남질 않아.
문: 왜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앉으셔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십니까? 진정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답: 동기 같은 건 없어. 자넨 무슨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난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야. 또 동기를 찾을 필요가 전혀 없어. 나와 육신을 혼동하지 말라구.
난 할 일도, 수행할 의무도 없어. 하나님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나의 그런 기준이 세상을 돌보게 되겠지. 자네들의 이 세계는 그처럼 돌봐줄 필요가 많지만 결국 자네 등은 마음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라구.
그리하면 거기에서, 오직 거기에서만 자네의 대답들을 발견하게 된다구. 다른 어디에서 답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나? 자네의 의식의 바깥에 뭔가가 존재하나?
문: 제가 모르더라도 존재할지 모릅니다.
답: 도대체 그건 무슨 존재겠나? 존재라는 것은 앎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존재는 모든 앎과 마찬가지고 자네와 관계된 거야. 하나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자네의 경험 속에서 존재 속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자네의 몸과 마음이 존재하는 것도 자네가 믿을 때에만 그렇다구. 그러니 몸과 마음이 자네의 것이라는 생각을 멈추도록 해. 그러면 그것들이 그냥 없어져 버릴 거야. 몸이나 마음으로 자네를 한정짓지 말고 그냥 전체로 살아.
만약 불완전을 보게 되더라도 싸우지 말고 그냥 계속 지켜보기만 해. 거기에 대한 관심을 두는 일 자체가 자네의 가슴과 마음 그리고 몸을 바르게 만들어주니까 말일세.
문; 그냥 안다고 해서 제 자신의 중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답: 그냥 외적인 증후만이 아니라 그 병의 전체를 알아야지. 모든 병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야. 우선은 마음을 잘 돌봐야지. 잘못된 모든 생각과 감정을 추적하여 제거함으로써 말이지. 그리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반드시 떨어져 나가게 되어있으니까.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여기는 대로 되게 마련이야.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포기하면 , 반드시 육신과 마음에 발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 순수한 관조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문: 제가 생각하는 바대로 되고, 또 지고의 존재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저의 지고의 존재는 단지 하나의 생각으로 남지 않습니까?